Denise_Melchin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는 미래를 지속시키거나 대단하게 만들기보다, 좋게 만드는 데 훨씬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 세계가 대단하거나 미래에는 대단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정도로 나쁜 상황이어서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이를 피하거나 개선시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리라 우리를 확신시킬 시나리오가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을 개선하는 데 차라리 “전통적인 단기주의”적인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장기주의가 효과적인 이타주의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효과적인 이타주의자들이 내가 왜 장기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지, 그 이유에 흥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 글은 장기주의라는 세계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명목 우선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장기주의로 연관 지어지는 명목들이 비장기주의적 관점 아래 더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요점별로 구성하고, 사실로 확인된다면 내가 장기주의에 대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증거나 주장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지도 적어 보았다. 여기서 내가 놓쳤을 수도 있는 다른 증거나 주장이 있다면 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내 논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는 내가 왜 ‘아마도’ 장기주의자일 수 없는지 이야기 하겠다.
장기적 미래의 질
1. 나는 공리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장기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공리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철저한 공리주의자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접근을 달리 하는가에 따라 아마도 장기주의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미래 세대들에게 세상을 가능한 한 좋은 상태로 물려주기를 무엇보다 바란다. 또한 나는 살아가는 시기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철저한 공리주의자 만큼, 존재하지 않았을 행복한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즉, 나는 인류가 더 크게 성장하여 우주까지 뻗어 나가는 것을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들이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멸종 위험으로 인한 잠재적 손실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의 단기적 영향에 대해서는 매우 관심이 있다) 몰론 이것은 내가 미래가 얼마나 좋고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기대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아래 참조)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논거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영된 가치가 구현되도록 하고 싶다. 예를 들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나는 그것에 훨씬 더 우선적인 가치를 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 선호도의 합보다, 폭넓은 집단의 다양한 선호들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는 비주류인 세계관에 무게를 실어주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을 잠식하거나 자신들의 가치를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전파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또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가치에 비중을 두고 싶다. 만약 이들이 현재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장기적 미래를 우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면 공리주의적 틀 내에서 도덕 현실주의와 공리주의의 정당성에 대해 나를 납득시키면 된다. 현재까지 도덕적 현실주의가 왜 일리가 있는지 설명하는 명쾌한 언어를 본 적이 없지만, 만약 있다면 나는 설득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세상이 갑자기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이 현재 내 삶만큼 향상된다면, 나는 기꺼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 대신, 미래가 위대해지고 지속되도록 만드는 데 집중하겠다.
2. 나는 인류가 본질적으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주의자들 중 대다수가 지지하는 세계관 중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인류는 훌륭하고 따라서 오랫동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염세주의자는 아니며 내 견해가 평균적인 유럽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류에는 내가 번창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대단한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대다수의 장기주의자들이 인류에 갖는 지나친 열정이 조금 혼란스럽다. 지금도 인류는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고 있으며, 인간 뿐만 아니라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수십억 마리의 가축들을 노예로 삼고 고문하고 있다. 나는 이 상황은 “인류는 훌륭하다”는 세계관과 합치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단지 이 상황은 우리가 해결책을 찾지 못한 문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인간은 게으를 뿐이지 악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영위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게으름은 변명이 될 수 없다.
현재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하지 않는다. GiveWell이 추천하는 자선단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수입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부하기로 결정한다. 사람들은 기후 변화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륙간 관광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또한 공장식 가축 사육 상황에 대해 들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식을 하고 있다. 국제 원조는 여전히 대부분의 선진국의 예산에서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시들은 상당히 범세계주의적 문제들이지만 나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한 번에 하나씩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예들을 따져볼 수 있겠다. 때때로 사람들은 실제로 필요한 정보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사람들은 경험적 불일치나 다른 도덕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물에게는 지각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같이). 때때로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정해 선을 행하는 다른 방법들을 우선시 하기도 한다. 나는 이와 같은 이유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 앞에는 여전히 엄청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리가 미래에 불행을 줄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옳은 행동을 하도록 하는 회유책과 강경책을 마련하기 위해 더 나은 제도를 구축한다면 이는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필요로 하는 인류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때문에 나는 그 시기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하도록 돕는 데 비중을 두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이는 미래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람들만큼 도덕적으로 자격이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말하면 인간이 정말로 그렇게 위대하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이 모든 위험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인류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논거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의 사람들이 얼마나 도덕적인가에 대한 나의 의견이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면 정말이지 무척 기쁠 것이다. 물론, 내가 관찰하는 세계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럴싸한 증거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데이터로 본 세상 (Our World in Data)의 맥스 로저 (Max Roser)가 주장하는 바 처럼, 사람들이 보다 나은 행동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은 실제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큰 효과를 갖는 정보 캠페인은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도덕적 의무를 다른 장소와 시대에서는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내가 느끼는 관심 부족은 그저 국지적인 일탈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내 세계관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되겠지만, 장기주의 공동체 내에서 (도덕적으로) 보다 나은 사람들을 양산하기 위해 사회적 혹은 의학적 계획에 보다 집중하는 것을 본다면 내가 장기주의적 사고를 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3. 나는 미래가 오늘날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 확신하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세상은 훨씬 좋아졌다. 극심한 빈곤은 줄어들고 기대 수명은 증가했다.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나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내가 보다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러한 추세가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는가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와 조기 사망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지만, 예를 들어 종교적 신실함의 쇠퇴와 같은, 장기주의자들은 찬사를 보내겠지만 어떤 이들은 생각이 다를 여러 추세가 존재한다. 또는 다른 측면에 비중을 둘 수 있겠다. 공장식 농장 가축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나아졌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관점이 일반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우려스럽다. Haidt의 도덕 기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발전은 배려/해로움의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은 충성/배신, 혹은 신성/비속과 같은 다른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는 나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나는 세계가 개선되어 온 것들이 대부분 부정적으로 변하기 전에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예를 들어 쾌락주의와 개인주의의 증가는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지만 지나치게 되면 세상에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며 안타깝게도 내게는 이미 우리가 그 상황에 이르렀거나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일반적으로 최적화하는 범위를 너무 좁게 설정함으로써 본연의 선한 목표를 지나쳐버리는 추세를 우려한다. 이익을 위한 최적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예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여기에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
세상이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면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추론은 의미가 없다. 이것은 내가 오래 지속되거나 대단한 미래보다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싶은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비슷한 이야기로 내가 장기주의에 동의하지 않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일부 장기주의자들은 기대하고 있으나 내 개인적으로는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미래 (예를 들어 쾌락주의의 충격적 여파)는 나를 장기주의에서 더 멀어지게 만든다. 문화적으로 많은 장기주의자들은 내 기준보다 쾌락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기술지상주의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논거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많은 이들이 세상이 그동안 어떻게 잘못되어 왔는지에 대한 단순한 사실을 접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다양한 세계관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여기게 하는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
장기적 미래의 지속성
나는 미래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소극적 전체주의조차 없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알 수 없는데, 소극적 전체주의는 미래의 가치를 감소시킬 자체적 위험을 지니고 있다.
또는 조금 다르게 보면 존재론적 위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존재론적 위기가 꽤 심각할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존재론적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장기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실존적 안정에 도달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
이 주제에 관한 다음 숏트폼 게시물도 살펴보자.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린디 규칙 (Lindy rule)으로, 자가번식이 몇 십억 년 동안 지속되어 왔으므로 앞으로 그 정도 기간은 지속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왜 자가번식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상대적으로 짧은,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류 문명에 린디 규칙이 적용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또한 낮은 확률에 대한 평가가 확실하지 않고 기대값이 주요 논의 대상이 되는, 대략적인 기대값 계산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 (이는 ‘총체적 사고’에 기반한 접근과 상반된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내가 이러한 결정으로 얻은 실적이 매우 좋지 않다. 대략적인 계산에서 나온 예상 기대값은 실제로 구현되지 않는다. 나는 또한 매우 큰 문명에 있어 잠재적으로 작은 확률을 우선하는 것에 대해 전통적인 파스칼의 내기 유형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논거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떻게 인류가 존재론적 안정에 이를 수 있는지에 관한 탄탄한 논리가 나타나기 바란다.
장기적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
나는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100년 남짓의 미래로 소멸되어 사라질 긍정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예외가 존재한다. 우리가 이 기간 내에 ‘갇히게 되는’ 시나리오를 피하거나 개선시켜 갈 능력이 있는 경우이다. 여기서 갇히게 되는 것은 인류가 피할 수 없는 무엇인가 이다. 멸종 위기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고 다른 영구적 문명 멸망도 이에 해당한다.
나는 실존적 위험에 대한 보스트롬의 정식 정의에 이러한 갇히게 되는 시나리오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전혀 무관하다고 여기는 시나리오 (트랜스 휴머니스적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또한 포함하고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앞으로 수 십년 밖에 안정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이 기간 내에 ‘갇히게 되는’ 시나리오를 개선하거나 예방하는 능력을 제외하고는 ‘제도적 의사 결정의 개선’과 같은, 이러한 명목 영역에 대한 노력이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또한 ‘현재 세상만큼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 혹은 더 낫지 않은 갇히게 되는’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인류가 하루종일 넷플릭스만 보는 미래를 막는 데 관심이 없다. 이러한 미래는 상당히 실망스럽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굶어 죽는 세상보다는 낫다.
현재로서는 나는 갇히게 될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종류의 나쁜 ‘갇히게 될’ 시나리오의 확률을 알지 못한다. 만약 미래의 조사에서 사실로 밝혀진다면 내 세계관을 장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야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다른 장기주의자들과 문화적으로 연결 고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향후 수십 년 내에 잘못된 ‘갇히게 되는’시나리오를 피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면 나는 ‘전통적인 단기주의’ 접근 방식으로 세상을 발전시켜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여기서 나의 견해는 8만 시간 팟캐스트에서 알렉산더 버거 (Alexander Berger)가 제시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수백 년 이상의 기간동안 의도적인 영향이 존재한다면 이에 대해 알고 싶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칼 (Carl)의 블로그 게시물을 숙지하고 있다.
조만간 이 주제를 조사하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가 피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나쁜 ‘갇히게 되는’ 시나리오가 가까운 미래에 나타난다면 장기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 또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내 세계관에 대한 결론을 벌써 내리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다른 견해들이 어느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할 가치가 있다는 대부분의 장기주의자들의 견해와는 충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의견을 바꿀만한 자료를 알려주실 분들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에 대해 듣고 싶다.
이 게시물의 초안에 조언을 준 AGB와 Linch Zhang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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