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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맥어스킬의 ‘우리가 미래에 빚지고 있는 것’ 제 1장
목소리가 없는 수십 억 명
미래의 사람들은 중요하다. 무척 많은 수의 사람들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것이 한마디로 장기계획주의이다. 이 주의의 전제는 간단하고 내 생각에는 그다지 논란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행동가가, 연구자들이, 정책입안자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도덕적 혁명에 해당한다.
미래의 사람들은 중요하나 우리는 그들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투표를 하거나, 로비를 하거나 또는 공직에 출마할 수 없으므로 정치인들이 이들을 고려 대상으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들이 우리와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할 수 없기에 시장에서도 입지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도 없다. 트위터를 하거나 신문에 기고를 하거나 거리 시위에 참가할 수도 없다. 완전히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인 것이다.
시민권이나 여성의 투표 참여권을 위한 운동과 같은 예전의 사회 운동은 사회에서 소외된 구성원들에게 지위와 영향력을 돌려주려고 애썼다. 나는 장기계획주의를 이 이상들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비록 우리가 미래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정치적 역량을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을 배려할 수 있다. 현재가 미래에 행사하는 횡포를 거두는 것으로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번창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돕는 관리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래의 사람들은 중요하다
미래의 인류가 중요하다는 의견은 상식이다. 미래의 사람들도 결국 사람들이다. 그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희망과 기쁨, 고통과 회환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얼마나 직관적인지 보기 위해 내가 등산을 하다가 유리병 하나를 떨어뜨려서 산산이 깨졌다고 치자. 그리고 내가 당장 치우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나중에 어떤 아이가 그 유리의 뾰족한 조각에 크게 베일 수도 있다. 그 유리 조각을 치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아이가 언제 다칠 것인가가 중요한가? 그것이 일주일이 될지, 10년 후가 될지, 아니면 100년 후가 될지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까? 아니다. 언제 일어나든 해를 끼치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또 전염병이 돌아서 마을 전체를 전염시키고 수천 명을 죽일 것이라고 치자. 당신은 이를 막을 수 있다. 행동을 취하기 전에 당신은 그 병이 언제 발병을 할지 알 필요가 있는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고통과 죽음을 이유를 막론하고 걱정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이 삶에서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를 떠올려 보자. 그것이 음악일 수도 있고 스포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다른 누군가도 어떤 것을 당신이 좋아하는 것만큼 열렬히 사랑한다고 하자. 그들이 미래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들의 기쁨의 가치가 사라지는가? 당신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이나 축구팀의 경기를 보러 갈 표를 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들에게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그 공연이나 경기 일정이 언제인지 알 필요가 있는가?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문제로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해 보자. 그들은 우리 중에 누군가는 미래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자신들의 삶을 둘러 볼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덜 현실적인가? 이 토론의 어느 쪽의 의견이 명확하고 타당하게 느껴질 것인가? 어느 쪽이 더 근시안적이고 편협하게 느껴지는가?
미래로의 거리는 공간에서의 거리와 같다. 몇 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살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중요하다. 같은 이야기로 몇 천 년 후에 산다고 해도 그 사람들도 중요하다. 두 경우 모두 거리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 발끝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국경에서 끝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세대나 그 다음 세상에서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상식에 해당한다. ‘노인이 자신이 결코 그 나무의 그늘 아래 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를 심을 때 사회는 발전한다’는 잘 알려진 속담이 있다. 우리가 방사성 폐기물을 버릴 때 “피해는 몇 백 년 후의 사람들이 입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라고 하지 않는다. 비슷한 이야기로 기후 변화나 오염을 염려하는 이들은 단지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들 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우리는 박물관과 공원, 다리를 지을 때 이것들이 몇 세대에 걸쳐서 존속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학교와 장기 과학 프로젝트에 투자한다. 우리는 그림과 전통, 언어를 보존하고 아름다운 곳들을 보호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걱정을 할 때 현재와 미래 사이의 선을 명확히 긋지 않고 미래를 현재의 연장선으로 여긴다.
미래 세대에 관한 염려는 다양한 지적 전통에 걸쳐 상식으로 통한다. 몇 백 년된 이로쿼이 – 뉴욕주에 살았던 아메리칸 인디언- 연합의 구전 헌법인 Gayanashagowa 에는 이를 명시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이는 연합의 족장에게 “언제나 현재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을 염두에 둘 것”을 촉구한다. 이로쿠이 연합의 Onondaga와 Seneca 국의 신봉자인 Oren Lyons는 이를 “7세대” 원칙으로 칭하며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앞으로 다가올 일곱 세대의 복지와 안녕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그 결정이 앞으로 다가올 일곱 번째 세대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고려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미래의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도 그들의 이익에 어느 정도 무게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 생각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는가?
특히 두 가지 이유가 나에게 설득력을 갖는다. 먼저 편애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미래의 사람들 보다 가족, 친구, 그리고 동료 시민과 같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당신에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더 신경 쓸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두 번째 이유는 상호성이다. 당신이 야생에서 은둔자로 살지 않는 한, 수많은 사람들- 선생님, 가게 주인, 기술자, 그리고 모든 납세자-의 행동들이 당신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제공하고 인생 전체에 걸쳐 당신은 그 혜택을 누려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래의 사람들은 현재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친밀한 관계와 상호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내 주장의 결말이 바뀌지 않는다. 내가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미래의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아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쏟는 것이 타인의 이익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며 현 세대를 중시한다는 것이 우리의 후손이 누려야 할 이익을 무시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어느 날 바다 밑에 숨겨진 거대한 문명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다고 하자.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많은 부분이 아틀란티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면 우리는 아틀란티스의 시민들에게 독을 내뿜는 것이며, 배 한 척이 가라앉으면 그들이 고철과 다른 부품을 재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아틀란티스 시민들과 그 어떤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들이 우리에게 베푼 혜택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행위가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미래는 아틀란티스와 같다. 미래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미지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 나라가 흥할지 망할지는 상당한 부분이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하는 가에 달려있다.
미래는 광대하다.
미래의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미래의 인구수도 중요하다. 당신이 화재에서 죽어가는 사람 하나를 살리거나 열 명을 살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한 경우 열 명을 살려야 한다. 또 어떤 질병에서 백 명 또는 천 명을 치료할 수 있다면 천 명을 치료하는 것이 맞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미래 사람들의 숫자가 방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장기간에 걸친 인류 역사를 살펴보자. 250만 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구상에 사람속 (genus Homo)의 일원들이 존재해 왔다.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30만 년 전 쯤에 등장하였다. 농경은 겨우 만 이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 도시들은 6천 년 전에야 형성되었고 산업 시대는 고작 25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는, 마차에서 우주 여행, 거머리에서 심장 이식, 공학 계산기에서 슈퍼컴퓨터에 이르기 까지 일생이 세 번 반복되는 시기 동안 일어났다.
현 인류는 얼마나 더 존재하게 될까? 물론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포함해 모든 불확실성을 고려해서 신빙성 있는 추측을 내 놓을 수는 있다.
미래의 잠재적 규모를 가늠하기 위해 우리가 다른 일반적인 포유류 종과 비슷한 기간만 존재한다고 하자. 이는 백 만년 정도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의 인구는 현재 규모를 유지한다고 치자. 이 경우, 앞으로 80조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만 배 더 많아질 것이다.
물론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멸종을 자초한다면 인류의 수명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훨씬 짧아질 것이다. 그러나 훨씬 길어질 수도 있다. 다른 포유류와 달리 인류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정교한 도구와 복잡한 문제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추상적 사고, 새로운 상황에 대비한 장기적 계획, 그리고 수백 만 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문화 등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다른 포유류와 달리 멸종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의 기대 수명에 비대칭적 영향을 준다. 문명의 미래는 몇 세기만에 끝나버릴 정도로 짧을 수 있다. 그러나 대단히 길 수도 있다. 지구에서 앞으로 몇 억년 동안 생물체들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세기 당 인구를 유지하면서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현존 인류 한 명당 백만 명의 미래 인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궁극적으로 복수의 행성에 거주하게 된다면 시간 규모가 말 그대로 천문학적이 된다. 태양은 앞으로 50억 년 동안 타오를 것이고 최후의 통상적인 별의 생성은 1조 년 후에나 발생할 것이다. 갈색왜성 (brown dwarf)간의 작지만 꾸준한 충돌이 이어지면서 영원히 빛나는 별들도 있을 것이다.
문명이 그렇게 긴 시간 지속될 수 있다는 실제 가능성은 인류의 기대수명을 엄청나게 확장한다. 지구가 더이상 생존 불가능해질 때까지 5억년을 생존할 가능성이 10 퍼센트라고 하면 기대 수명은 5천년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최후의 통상적인 별의 생성까지 생존할 확률이 1퍼센트인 경우에도 기대수명은 100억년 이상이 된다.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기대수명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할 것인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언제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존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미래의 인구는 현재보다 훨씬 적어질 수도 있고 많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의 인구가 적어진다면 최대 현재 세계 인구 규모인 80억보다는 적을 것이다. 반면 미래 인구가 커진다면 훨씬 커질 수 있다. 현재 전세계 인구는 이미 사냥-수렵 시기에 비해 천 배 이상 증가하였다. 세계 인구 밀도가 농업 순수출국인 네덜란드 수준으로 높아진다면 미래 어느 시기이든 인구가 700억 명에 달할 것이다. 이 수치가 다소 황당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현재 인구 80 억 명도 사냥/채집을 하던 선사 시대나 초기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수치였을 것이다.
인구 규모는 우리가 다른 행성을 정착지로 삼는다면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태양은 지구에 닿는 햇빛의 수십 억 배를 방출하고 있고 우리의 은하계 전체에 다른 행성이 수 백억 개 존재하고 있으며 수십 억 개의 은하계가 있다. 따라서 먼 미래에는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
도대체 어느 정도 많이 일까? 정확한 추정치는 불가능할 뿐더러 불필요하다. 어떻게 계산을 하더라도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 도표를 보자. 모형 하나는 100억 명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대략 천 억 명의 사람이 태어났다. 따라서 이들은 모형 열 개로 표시된다. 현존 인구는 80억 명에 달하는데 반올림해서 100억명이라고 하면 모형 한 개에 해당한다.
이번에는 미래 인구를 나타내 보겠다. 우리가 현재 인구 수준을 유지한 채 지구에서 5억 년을 산다고 하자. 이에 해당하는 미래 인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도식으로 보니 얼마나 많은 삶이 위태로울 수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도식을 축소했음을 고백한다. 실제로 미래 인구를 다 그리면 2만 장은 족히 되어 이 책을 백 배 이상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모형 하나가 100억명에 해당하며 그 안의 각각의 삶이 번창할 수도, 또는 형편없게 될 수도 있다.
전에 오늘날의 인류가 경솔한 10대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아직 앞날은 창창하고 지금의 결정들이 남은 여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이 비유도 내 우려를 담아 내기 부족하다. 십대는 적어도 앞으로 자신의 기대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이나마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기대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마치 몇 달 안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지만 천 년은 너끈히 살게 될 지도 모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십대와 같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앞으로 당신에게 주어질 지도 모를 긴 미래에 대해 신중히 고려할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무시하고 살 것인가?
미래의 규모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일반적으로 ‘장기적’ 사고는 최대 몇 년, 혹은 몇 십 년에 대한 관심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류의 기대 수명을 적게 잡아도 이것은 10대가 장기적 사고라는 것은 모레는 차치하고 단지 내일만 고려하는 것을 뜻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우리가 진정으로 미래 세대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들 또한 우리처럼 행복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인정을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살아갈 세상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고려해야할 의무가 있다.
미래의 가치
미래는 거창할 수 있다. 또한 매우 좋을 수도, 매우 나쁠 수도 있다. 얼마나 좋아질 수 있을지 가늠하려면 지난 몇 세기에 걸쳐 인류가 이루어 낸 진보를 살펴볼 수 있다. 200백 년 전 평균 수명은 채 서른도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일흔 세 살에 이른다. 당시에는 전 세계 인구의 80 퍼센트 이상이 극빈층에 해당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그 수가 10 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문맹률 또한 90 퍼센트에 달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15퍼센트 이하이다.
우리는 함께 이러한 긍정적인 발전 방향을 지속시키며, 이산화탄소 배출과 공장식 농장에서 고통받는 가축의 수의 급격한 증가와 같은 부정적인 경향의 방향 또한 전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오늘날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사는 제일 행복한 사람들처럼 살 수 있는 세상, 그 누구도 빈곤에 허덕이지 않으며 모두에게 충분한 의료가 제공되는 세상, 가능한 한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실로 우리는 이 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껏 경험한 것 중에 최고는 가능한 것에 대한 잘못된 지침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1700년대 영국의 부유한 남자의 삶을 생각해 보자. 가장 좋은 음식을 먹고 가장 좋은 의료 혜택을 누리며 당시 최고급 물건만을 사용하던 한 남자가 있다고 치자.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연두, 매독, 또는 발진티푸스 등으로 인해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수술이 필요하거나 치통이 있는 경우에도 치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고 감염의 위험 또한 상당했다. 그가 런던에 살았다면 그가 들이마신 공기는 오늘날보다 열 일곱 배는 오염되었을 것이다. 영국 내의 이동에도 몇 주 씩 걸렸으며 세계 대부분의 지역은 가 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가 상상하는 미래가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큼 부유해지는 것이었다면 전기, 마취, 항생제, 그리고 현대적 이동수단과 같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많은 것들을 예측해 내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는 과학기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변화 역시 이에 기여해 왔다. 1700년에는 여성들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페미니즘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부유한 영국 남자가 게이였다면 그는 공개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동성 간의 성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1700년 말에는 전 세계 인구의 75 퍼센트가 강제 노동의 피해자였으나 지금은 1퍼센트 미만이 이에 해당한다. 1700년에는 민주주의를 경험한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면 오늘날에는 전 세계 절반 이상이 민주주의제도 하에 살고 있다.
우리가 1700년 이후 이뤄 온 발전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측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단지 300년 사이에 일어났다. 인류는 지구에서만 몇 억년 동안 존속이 가능하다. 이러한 규모에서 볼 때 우리가 인류의 잠재력을 현재 세계의 고정된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 미래의 삶이 얼마나 좋을지에 대해 지나치게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당신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지거나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또는 창조적인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즐거움, 아름다움, 그리고 긍정적 기운의 순간들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순간들은 가능성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우리는 삶이 적어도 그때만큼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순간들은 우리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며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으로 이끈다. 나의 최고의 날이 편안하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삶보다 백 배는 낫다면 아마도 미래의 최고의 날들 또한 평범한 일상보다 백 배는 더 나을 것이다.
나는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 (utopia)’의 어원을 살펴보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며 실제로 여기서 이상적인 미래 상태로 가는 길은 매우 희미하다. 그러나 이상적인 미래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다 나은 단어는 노력을 기울여야 닿을 수 있는 곳, ‘좋은 곳’ 을 뜻하는 ‘유토피아 (eutopia)’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후손들을 위해 길을 터 준다면 충분한 인내심과 지혜를 가지고 그들이 실제로 건설 가능한 미래이다.
그리고 미래가 멋질 수도 있지만 또한 끔찍할 수도 있다. 이를 확인하려면 과거의 부정적인 추세를 살펴보고 이것들이 세상을 이끄는 지배적인 세력인 미래를 상상해 보자. 노예제도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12세기 말까지 모두 사라졌지만 식민지 시대에는 이 나라들이 대규모 노예무역상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또는 12세기 중반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조차 전체주의 정권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아니면 과학적 발전이 핵무기를 만들고 공장식 농장을 건설하는 데 쓰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유토피아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스토피아도 현실이 될 수 있다. 미래에 전체주의 정권 하나가 전 세상을 지배할 수도, 오늘날의 삶의 질이 단지 희미한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아니면 3차 세계대전으로 문명 전체가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다. 미래가 멋지든 끔찍하든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기후변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래가 거대하고 중요하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장기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아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대상이 많으며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을 돌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분야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장려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는 매우 중요하기에 적어도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미래를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꼭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과거를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장기적 영향을 고려한 예는 많지 않지만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개중 놀라울 정도로 성공을 거둔 케이스도 존재한다. 시인들에게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 (“당신을 한여름에 비유해 볼까요?”) 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자신이 동경하는 한 청년을 영원히 지켜낼 수 있다고 적는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불멸의 시 속에서 영원할 것이니까요.
사람들이 숨쉴 수 있고 눈이 있어 볼 수 있는 한, 그리고 이 시가 존재하는 한, 그대 또한 이 시 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소네트 18번은 1590년대에 쓰여졌지만 그보다 한참 전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기원전 23년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는 자신의 송가에서 마지막 시를 다름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나는 청동보다 견고하고 피라미드의 장엄한 구조보다 고귀한 기념비를 완성했다. 이는 비에 녹슬지도 않을 것이고 휘몰아치는 북풍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며,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의 대부분은 죽음의 여신을 피하게 될 것이다.
이 문구들은 매우 과장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인이 추구한 불멸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들은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살아남았고 실제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셰익스피어가 생존했을 당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며 호라티우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미래 세대 중 일부가 이 시들을 보존하거나 복제하는 데 드는 약간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려 한다면 이 시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다른 작가들도 자신의 영향력이 오랜 시간 지속되기를 꾀했고 이에 성공했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썼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역사적 사건을 자세히 기술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려 한 서구 최초의 역사가로 간주한다. 그는 자신이 일반적인 진실을 묘사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자신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과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러하니)이 언제 일어나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저작은 즉각적인 청중의 취향에 맞도록 쓰여진 글이 아니라 후대에 영원히 남겨지도록 작성되었다.
투키디데스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다. 웨스트 포인트와 아나폴리스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미합중국 해군참모대학교 등에서 필독서로 되어 있다. 2017년에 널리 읽힌 정치 과학자 그레엄 앨리슨 (Graham Allison)저 <예정된 전쟁 Destined for War> 에는 ‘과연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앨리슨은 미중 관계를 투키디데스가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관계를 바라 본 틀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한다. 내 생각에는 투키디데스는 기록된 역사 상, 의도적으로 먼 훗날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를 실행에 옮긴 첫 번째 사람이다.
보다 최근의 예로는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들 수 있다. 미국 헌법은 약 2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건국은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일이며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두 번째 대통령 존 아담스는 “현재 미국에서 확립된 제도는 수천년이 지나도 존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부터 바르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발을 잘못하게 되면 우연을 기대하지 않는 한 바른 길로 되돌아 올 수 없다.” 고 언급했다.
비슷한 예로 벤자민 프랭클린은 미합중국의 장수에 대해 확신에 차 있던 것으로 유명해서 1784년 프랑스의 한 수학자는 만약 프랭클린이 진실로 그 신념이 확고하다면 그의 사비를 털어서 수 세기 이후의 사회 프로젝트에 드는 비용을 미리 지불하는 데 투자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리혜택을 노려야 한다고 우호적인 풍자를 썼다. 프랭클린은 이것이 꽤 좋은 생각이라고 여겨 1790년에 1000 파운드 (현재 13만 5천달러 상당) 를 보스톤과 필라델피아에 각각 투자했다. 자금의 4분의 3은 100년 후에 지급되고 나머지는 200년 후에 지급되도록 설정했다. 1990년 최종 기금이 배분되었을 때 기부금이 보스톤은 500백만 달러 가까이, 필라델피아의 경우 230만 달러로 늘어났다.
미합중국 건국의 아버지들 자신들도 그들보다 2000 년 가량 앞선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권력 분립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통치에 대한 폴리비우스의 분석을 바탕으로 한 로크와 몽테스키외에의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다수가 폴리비우스의 저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장기적 미래에 예측 가능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투키디데스나 프랭클린과 같은 대단한 영향력을 필요치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운전을 하고 비행을 한다. 이를 통해 온실가스를 배출함으로써 장기적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자연적인 과정으로는 수십 만 년 후에야 이산화탄소 농도를 산업화 이전 수준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시간 경과는 보통 방사성 핵폐기물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그러나 핵발전의 경우 우리는 폐기물 처리에 대해 신중하게 계획을 세운다. 반면 화석 연료의 경우 그 폐기물을 그저 공기 중으로 흘려 보낸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지구 온난화의 지구물리학적 영향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진정되기 보다 훨씬 더 심해지기도 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IPCC)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중저 배출 시나리오 대로 전개된다면 해수면은 21세기 말까지 0.75 미터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2100년 이후에도 해수면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다. 1만년 후에는 해수면이 오늘날보다 10에서 20 미터 가량 더 높아질 것이다. 이 경우 하노이, 상하이, 캘커타, 도쿄, 그리고 뉴욕은 대부분 해수면 아래로 잠기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당장의 행동이 장기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과 계획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 꼭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득을 무시한 채 행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상황을 개선하는 동시에 미래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청정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은 오늘날 인류의 건강 측면에서도 엄청난 이점을 제공한다.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은 폐암이나 심장 질환 및 호흡기 질환을 야기하는 미세 입자로 공기를 오염시킨다. 그 결과 매년 3600 만 명이 조기 사망하고 있다. 전 세계적 기준에서 상대적으로 오염이 덜한 유럽연합에서도 화석 연료에 의한 대기 오염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의 수명이 평균적으로 1년씩 단축되고 있다.
그러므로 탈탄소화, 즉 화석 연료를 청정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것은 장기적인 기후 혜택 뿐만 아니라 크고 즉각적인 보건 이점을 제공하게 된다. 대기 오염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다면 세계 경제의 급속한 탈탄소화는 건강상의 이득만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탈탄소화는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삶을 개선하는 데 모든 면에서 득이 된다. 실제로 태양광, 풍력, 차세대 원자력 및 대체 에너지원과 같은 청정에너지 분야의 혁신을 장려하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도 이득이다. 에너지 생산 비용을 줄임으로써 청정에너지 혁신은 가난한 국가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다. 지하에 묻혀 있는 화석 연료를 그대로 두는 것으로 6장에서 논의할 회복 불가능한 붕괴 위험을 막을 수 있다. 기술적 진보를 촉진함으로써 7장에서 살펴볼 장기적 경제침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모든 면에서 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탈탄소화는 먼 미래를 보호하고 향상시키려는 윤리적 관점의 총체인 장기주의 (Longtermism) 개념이 필요한 이유이다. 청정에너지 혁신은 매우 바람직하며 앞으로 이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나는 이것을 다른 잠재적 활동과 비교할 수 있는 장기주의 운동의 기준선으로 본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기대 수준 또한 상당히 높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탈탄소화가 장기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장기적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도덕적 변화, 인공지능의 확대를 현명하게 관리, 조작된 전지구적 전염병 예방 및 기술적 침체를 피하는 것 또한 모두 동등하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근본적으로 방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역사에서 우리의 역할
우리가 장기적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초래할 위험이 상당할 수 있다는 관점은 터무니없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장기주의의 무모함은 기저에 깔린 도덕적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우 특이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최근 몇 십년 간 매해 평균 3 퍼센트 가량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세계 경제성장률을 살펴보자. 이는 역사적으로 전무하다. 인류 등장 이후 첫 29만년 간 세계 경제성장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다가 농경사회에 접어들어 0.1 퍼센트 정도가 되었으며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커졌다. 세계 경제가 매년 2 퍼센트 성장률을 보인 것은 불과 백 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만 년 전부터 오랜 시간동안 세계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커지는 데 수 백 년이 걸렸던 것이 최근에는 고작 19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경제적 성장률 뿐만 아니라 에너지 사용, 이산화탄소 배출, 토지 이용 변화, 과학적 진보 및 도덕적 변화에 있어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그러므로 현 시대가 과거와 비교해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또한 미래와 비교해도 예외적이다. 이러한 급속한 수준의 변화는 우리가 성장을 탄소 배출에서 완전히 분리시킨다고 해도, 미래에는 탄소를 저 멀리 은하계로 보낸다고 해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래의 성장률이 매년 2퍼센트 정도로 조금 늦춰진다고 가정해 보자. 이 속도라면 만 년 후에는 세계 경제 규모가 오늘날과 비교해10⁸⁶ 배 커지게 된다. 즉, 우리가 현재보다 몇 백 조의 조, 조, 조, 조, 조, 조 배를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1만 광년 내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는 10⁶⁷ 개 미만이다. 따라서 현재 성장률이 단 만 년만 지속된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원자로 현재 세계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의 천 만 조 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는 실제로 불가능해 보인다.
인류는 백만 년, 혹은 10억년 이상 잔류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변화율은 단지 몇 천년 정도만 지속 가능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와 미래 양쪽 모두와 비교했을 때 우리가 살아 온 매 10년마다 엄청난 숫자의 경제, 기술적 변화가 나타났다. 그리고 화석 연료 발전, 핵무기, 조작된 병원체 및 고도의 인공지능과 같은 일부 변화는 미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칠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급속한 변화 속도 만이 현 시대를 특이하게 만드는 요인은 아니다. 우리는 여느 때 보다 훨씬 연결되고 있다. 지난 5만년 동안 우리는 별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들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및 호주 전역의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100년부터 서기 140년 사이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왕조는 각각 전 세계 인구의 30 퍼센트 가량을 차지했지만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한 제국 내에서 조차도 한 지역에 거주하는 이가 반대편에 거주하는 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미래에 우리가 영역을 은하계까지 확장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은하는 군도처럼 광활한 공허함 속에 미세한 점들로 따스함이 흩뿌려져 있다. 은하수의 규모가 지구만 하다고 가정하면 우리의 태양계의 지름은 10 cm에 불과할 것이며 우리의 이웃들로부터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은하의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 사이에 가장 빠른 소통은 십만 년이 걸리게 될 것이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과도 한번 소통이 갔다 오는 데는 9년 가까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인류가 서로 멀리 떨어져 긴 시간 존재하게 된다면 결국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우주는 수백 만 개의 은하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속한 은하단을 간단히 지역 그룹이라 부르는데 각 그룹 내의 은하들은 중력이 영원히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로 묶어 둘 만큼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므로 은하단 또한 결국 서로 쪼개지게 될 것이다. 미래에 1500억년 이상 빛조차도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해 질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매우 특별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에 사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우리는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급속한 기술적, 사회적, 환경적 변화는 나쁜 가치에 종속되거나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술들을 관리하는 것을 포함하여 이러한 변화 중 가장 중요한 변화가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이 지금과 같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은 소규모 집단이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사고가 한 대륙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퍼지는 데 몇 세기가 아닌, 단 몇 분이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변화가 아주 최근에 일어났다는 것은 평형 상태가 깨졌다는 뜻이다. 사회는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안정 상태에 놓이게 될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커다란 공이 울퉁불퉁한 지역을 매우 빠른 속도로 굴러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은 추진력을 잃고 속도가 줄어 계곡 바닥이나 틈새에 멈추게 될 것이다. 인류 문명은 이러한 공과 같아서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작은 자극으로도 굴러갈 방향과 멈추게 될 위치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